![[인생은비매품] 회계법인을 떠나 한옥을 고치기 시작한 회계사 이야기](https://static.toss.im/photos/bankfeed-home-eggmoneyna-12-cover.png)
[인생은비매품] 회계법인을 떠나 한옥을 고치기 시작한 회계사 이야기
서울 역삼역 대형 회계법인으로 출퇴근하던 회계사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3년 전, 그는 돌연 출근지도, 삶의 터전도 해남으로 옮겼습니다. 도시의 정점에서 땅끝마을로 향한 것이죠. 해남의 오래된 집을 고쳐 한옥스테이를 열고, 마을 사람들과 프로젝트를 만들며, 바다와 마당을 일상으로 삼아 전혀 다른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김지영 님의 이야기는 스스로의 길을 선택한 기록입니다. 숫자로는 잴 수 없는 인생의 가치, 돈으로는 살 수 없는 마음의 평화를 찾아가는 여정에서 우리는 놓치고 살던 질문을 또렷하게 발견하게 됩니다. 지영 님은 이렇게 말합니다. “인생은 흘러간다고 해도, 그 안에서 우리는 분명 선택할 수 있다.” 이 글을 따라가다 보면, 우리 마음속에도 조용히 이런 물음이 떠오를 것입니다. 나는 어떤 선택으로, 내 삶의 항로를 정하고 있을까?
서울에서 목포행 KTX를 타고, 다시 한 시간을 달려왔습니다. 드디어 해남이네요!
어서 오세요. 확실히 서울 풍경이랑은 다르죠? (웃음) 공기도 다르고요. 저도 서울 갔다가 목포역에만 도착해도 확 달라요. 앉아서 숨 좀 돌리다 보면 마음에도 여유가 생길 거예요.
저희가 만난 이곳, 소개 부탁드립니다.
여기는 제가 해남에 내려와서 처음 고친 집이자 한옥스테이 ‘와카(WAKA)’로 운영하고 있는 곳입니다. 1979년에 지어진 집인데, 처음 봤을 때 서까래가 정말 굵고 튼실하더라고요. 그동안 봤던 어떤 집보다도 튼튼해 보여서 ‘여긴 고칠 만하겠다’ 하고 마음을 정했죠.
특별히 한옥을 선택한 이유가 있었나요?
처음에는 시골집을 고쳐서 합법적으로 숙박업을 하면 되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막상 알아보니까 쉽지 않더라고요. 개인은 ‘농어촌민박업’으로 한 채를 운영할 수 있는데, 법인은 그게 안 되는 거예요. 그래서 한참 고민하다가 알게 된 게, 유일하게 한옥만은 법인도 농어촌민박업으로 등록할 수 있다는 사실이었어요. 그 순간 ‘그럼 한옥을 찾아야겠다’ 하고 마음을 정했죠. 전국을 뒤져보다가 결국 땅끝에 있는 이 집을 만났고, 보자마자 ‘여기다’ 싶어서 고쳐 살게 됐습니다.
잠깐만요, 그러면 해남에 어떠한 연고도 없었던 거군요?
네, 이 집 하나 보고 선택했어요. 사람들은 다 신기해하더라고요. 그런데 아버지가 군인이셔서 어릴 때부터 1~2년에 한 번씩 이사를 했거든요. 그러다 보니 새로운 지역으로 이주하는 게 저한테는 두렵거나 낯설지 않았던 것 같아요.
이 집은 얼마에 매입했나요?
5천만 원에 매입했어요. 그런데 인테리어비가 매입가의 4~5배 정도 들었죠. 특히 마당에 돈이 정말 많이 들어갔어요. 숙박업을 하려면 마당에 풀도 있어야 하고, 여기서 보이는 뷰도 잘 보여야 하잖아요. 비가 와도 물이 차지 않게 바닥을 다 작업하고, 담도 새로 세우고…. 집 안을 고쳤을 때는 ‘이제 거의 다 됐다’ 싶었는데, 막상 마당을 시작하니까 돈이 크게, 크게 들어가더라고요.
모두 합치면 꽤 큰 돈인데요!
빼둔 전세금이 있었거든요. 원래는 회사 다닐 때 해외 파견 업무를 지원했는데, 코로나19 대유행으로 막히면서 오갈 데 없는 돈이었어요. 또 그 시기에 주식시장이 요동쳤잖아요. ‘한번 공부해 볼까?’ 싶어서 진짜 열심히 공부해서 투자했는데, 엄청 큰 수익은 아니어도 재미를 좀 봤죠. 그래서 그런 돈들이 제게 믿는 구석이 되었어요.
회계사이니 지출 관리 같은 건 더 철저하게 했을 것 같아요.
예전에는 제 재무제표를 만드는 게 취미였어요. 매달 수입이 얼마고, 나간 게 얼마고, 그래서 지금 자산 상태가 얼마인지 정리하는 걸 즐겼죠. 그런데 오히려 이 일을 시작하고 나서는 일부러 안 보게 되더라고요. ‘어떻게든 되겠지, 필요한 돈은 마련되게 돼 있어’ 하면서요. 어느새 스스로 회계사답지 않은 말을 하고 있더라고요. (웃음)

해남 내려오기 전 이야기도 잠깐 듣고 싶어요. 어떤 일을 하셨나요?
역삼역에 있는 회계법인에서 회계사로 일했어요. 처음 회계 원리를 배웠을 때는 정말 신기했죠. ‘세상을 이런 프레임으로도 볼 수 있구나’ 하면서, 새로운 안경을 하나 얻은 기분이었어요.
그런데도 결국 그 일을 떠난 이유는 뭘까요?
잘 해내고 싶고, 월급 값은 하고 싶고… 그러다 보니 항상 완벽해야 한다는 압박이 있었어요. 전문직이다 보니 제 의견이 늘 ‘맞아야 한다’라는 부담도 컸고요. 리스크가 늘 존재하니까 더 힘들었죠. 그런데 주변 동료들이 다들 비슷하게 지내니까 ‘그냥 다 그런가 보다’ 하고 버텼던 것 같아요. 그러다 어느 날부터는 몸이 말을 안 듣더라고요. 메일 답장을 미루고, 전화도 받기 싫고. 그제야 내가 지치고 힘들다는 걸 천천히 인정하게 됐어요.
그래서 다른 길을 찾아본 거군요.
그러던 차에 ‘핀테크 창업 아카데미’라는 프로그램을 알게 됐어요. 그냥 한번 들어나 보자 하고 신청했는데, 운 좋게 참여하게 됐죠. 그때 멘토링해 주신 분이 사회적 기업 분야에서 활동하시던 대표님이셨어요. 관심 있는 걸 말해보라고 하셔서 “빈집을 고쳐 워케이션 공간을 만들어보고 싶다”라고 했더니, 그게 이렇게 사회적 기업 육성 사업 지원으로까지 이어진 거예요. 흘러 흘러 지금 이 자리까지 오게 된 거죠.
주거지도 바꾸고, 일도 바꿨네요. 그렇다면 마음의 평화도 따라왔나요?
아니요. (웃음) 환경을 해남이라는 풍요로운 땅으로 바꿨는데도, 여전히 불안하고 뭔가를 완벽하게 통제하지 못하는 제 모습이 원망스러울 때가 있는 거예요. 가까운 지인들이 “규모는 얼마나 돼?”, “투자 규모는 어때?” 이렇게 물어보면, 그냥 “작은 사이즈야” 하고 넘기면 되는데도 그게 제 마음을 찌르더라고요. ‘내가 좀 더 대단한 걸 보여줘야 하나?’ 이런 생각에 고민이 깊어지고요.
뭔가 다른 솔루션이 필요했네요.
겉으로 보기엔 고요해 보이지만 속에서는 그 ‘혼문’ 아래의 느낌으로 난리가 나는 거죠. 그래서 방법을 찾다가 마음을 본격적으로 탐구하기 시작했어요. 비과학부터 과학까지 관련 책은 싹 다 봤어요. 그리고 인정하는 것부터 시작했어요. 햇볕 정책처럼. “그래, 네가 지금 불안하구나” 하고 받아들이는 거죠.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는 직접 말을 걸기 시작했어요. “불안아, 너 혹시 나한테 하고 싶은 얘기가 있어서 온 거야?” 이렇게요.
불안이는 어떤 말을 하던가요?
솔직히 꽤 신랄했어요. “그래, 그래서 이전보다 돈 못 벌고 있잖아. 어쩔 건데?” “너, 당장 몸 아프면 어쩔 거야?” 부모님이 할 법한(?) 직설적인 질문들을 막 쏟아냈죠. 근데 멈추지 않고 생략하지 않고 끝까지 다 말하고 다 들었어요. 그리고 말했죠. “그래, 네가 나를 지키려고 그런 생각을 했구나. 나를 지켜줘서 고마워. 근데 지금 나는 니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안전한 데 있어. 괜찮아. 어쨌든 또 하고 싶은 말 있으면 언제든 들어줄게.”
방금 말씀으로 저도 힐링이 됐어요. 사실 불안이의 말에도 공감했던 게 돈과 불안은 늘 따라다니는 것 같거든요.
맞아요. 저도 통장을 들여다보면서 처음 그런 생각을 했어요. 얼마가 있으면 나는 불안하지 않고 행복할 수 있지? 그런데 금액을 아무리 늘려봐도, 그 어떤 절대적인 액수가 마음의 평화를 보장해주진 않더라고요. 결국 우리가 ‘돈’ 혹은 ‘생산성’으로 인간의 쓸모를 평가하는 사회에 살고 있지만, 그게 굳이 내 안에서 나를 평가하는 잣대일 필요는 없다는 거죠. 그래서 내가 뭔가 해내지 못하는 것 같아 스스로 작아지는 순간이 오면 이렇게 다잡아요. 돈은 숫자일 뿐이다. 나는 이미 충분하다. 그렇게 명상을 하듯 반복하다 보니, 정말 마음이 조금씩 편안해지더라고요.
돈으로 살 수 없는 생각이네요. (웃음)
마을에 장 명인님이 계시는데, 그 집에 1700년부터 내려온 씨간장이 있어요. 벌써 325년이 된 거죠. 할머니들이 매일 그 장독대를 돌면서 냄새를 맡아보고, 뭔가 이상하면 독을 바꿔주고 하면서 계속 살피신대요. 그 얘기를 들으면서 제 마음이랑 겹쳐 보였어요. 내 안에 있는 기질이나 성격, 마음의 역동 같은 것들이 결국 된장이나 간장 같은 거라면, 내가 사는 환경은 독이구나 싶더라고요. 그래서 생각했어요. 저도 ‘나’라는 장에게 좋은 독, 좋은 장독대, 좋은 날씨를 만들어줘야겠구나, 그래야 내가 맛있고 훌륭하게 숙성될 수 있겠구나 하고요.

한옥스테이 운영 말고도 여러 활동을 하고 있는 걸로 알아요.
와카를 열고 나서 고민이 생겼어요. 어떻게 하면 더 많은 사람이 해남에 올 수 있을까? 하는 거죠. 그러다가 ‘걷기만 해도 이 지역의 여러 경험을 할 수 있는 길이 있으면 좋겠다’라는 아이디어가 떠올랐어요. 그 생각을 들고 군수님을 찾아갔는데, 말씀드리자마자 “너무 좋다” 하시더라고요. 군에서는 하드웨어를 짓는 데 투자하고 계시고, 저희는 청년 마을 공모 사업을 받아서 지역을 기반으로 여러 문화 행사와 프로젝트를 만들어가고 있어요.
프로젝트명 알려주세요.
이 마을이 원래 옥공예로 유명하거든요. 그래서 ‘옥’을 뒤집어서 ‘눙눙길’이라고 이름을 붙였어요. 지금은 마을회관 창고를 개조해서 그 공간을 눙눙길 1번지라고 이름 붙이고 사무실로 쓰고 있어요.
눙눙길에서 어떤 일들을 추진했는지 궁금해요.
두 가지를 소개해 드리고 싶어요. 하나는 옥동초등학교라는 폐교에서 열었던 페스티벌 ‘아수라활활타’예요. 철거를 앞둔 학교였는데, 마지막으로 화려하게 불태워보자는 마음으로 축제를 기획했죠. 15팀, 30명 정도의 예술가들이 모여 전시와 공연을 펼쳤고, 마지막에는 모두가 함께 모여, 말 그대로 활활 불태우는 축제를 만들었던 기억이 있어요.
또 하나는 마을 뒤에 있는 옥매광산과 관련된 역사예요. 일제강점기 때 옥매광산 광부들이 제주도로 강제로 이주당했다가, 광복 직후 귀환길 배에서 의문의 불이 나면서 한국말을 하는 분들은 바다로 내던져지고, 일본말을 하는 사람들만 구조됐다는 사건이 있었대요. 그때 희생된 광부가 118명이었고, 지금도 추모비가 남아 있어요. 그런데 지역에서도 잘 알려지지 않은 역사라서 저희가 그 이야기를 예술로 풀어보자고 했죠. 현지의 돌·식물·흙 재료를 활용해 작품을 만들고 해남과 광주 충장로에서 전시를 열었어요.
지금 하는 일이 예전 회계사 시절과는 전혀 다른 길처럼 보이기도 해요.
저는 오히려 연장선에 있다고 느껴요. 회계사로 일하면서 배운 건 ‘구조가 어떻게 굴러가는지’를 큰 시선에서 보는 눈이었거든요. 그 경험이 있으니까 지금도 단순히 ‘축제 한 번 해보자’에 그치지 않고, 판을 키워서 군과 함께, 또는 다른 기관, 단체와 협력하며 이런 프로젝트, 저런 프로젝트를 그릴 수 있는 거죠. 그래서 지난 시간이 헛되지 않았다고 생각해요. 오히려 그때의 경험이 지금 제가 만드는 일의 기반이 되고 있다고 느끼고요.

해남에 살면 바다에도 자주 가겠어요.
네, 저녁에 구름이랑 산책하러 많이 와요. 서울에 살 때는 한강을 자주 찾았는데, 지금은 그 대신 바다죠. 파도도 잔잔하고 건너편에 진도도 보여서 호수 같은 느낌이 들어요. 친구들한테는 “나 해남에 프라이빗 비치 있어” 하고 자랑해요. 물론 제 땅은 아니지만요. (웃음)
바다를 보면서는 어떤 생각을 하세요?
저도 스스로에게 자주 물어요. 나 왜 굳이 여기 와서 이러고 있지? 하고요. 그런데 막상 살아보면, 마치 큰 강물 위에 튜브를 타고 동동 떠다니는 느낌이에요. 저항하려고 하면 오히려 더 부대끼고 힘들더라고요. 그래서 편안하게 받아들이기로 했어요. 그 안에서도 오른쪽으로 갈 수도, 왼쪽으로 갈 수도 있는 선택은 있으니까요. 그리고 시간이 지나 돌아보면, 결국은 이렇게 되려고 내가 이 강을 흘러왔구나 싶은 순간들이 있더라고요.
앞으로는 어떤 계획이 있어요?
지금은 나한테 집중하는 시간을 좀 더 가져보고 싶어요. 애쓰지 않아도 그냥 ‘나’로 존재하는 시간이 조금씩 길어지는 경험을 해보고 싶거든요. 그게 제 디폴트 값이 될 수 있게요. 사실 어떻게 해야 할지는 아직 잘 모르겠어요. 다만 해야 하는 일로 저를 몰아붙이지 않고 편안하게 지내다 보면, 그 안에서 방법을 찾아가게 되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 시간을 보내는 데 해남이라는 곳은 어떤 의미가 있나요?
해남의 풍요로움, 그리고 제가 가꾸고 있는 이 공간들이 저를 천천히, 오래 익혀주는 장독 같은 존재인 것 같아요. 저도 시간과 공을 들여 잘 익어 볼 생각입니다.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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