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비매품] 금융인 대신, 바다 위 모험을 택한 서퍼 부부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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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비매품] 바다 위에서 인생의 파라다이스를 찾은 서퍼 부부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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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파도를 따라 사는 중 – 키위브라운 사쿠 X 송희 서퍼

제주 이호2동 오도롱마을, 공항에서 불과 몇 분 거리라 하늘 위로 비행기가 쉼 없이 오갑니다. 그런데 이 땅의 시간은 전혀 다른 속도로 흐릅니다. 바다는 언제나 그랬듯 천천히 넘실대고, 몇십 년을 그 자리에 있었을 듯한 낮고 오래된 집들이 줄지어 있습니다.

그중 눈길을 사로잡는 집이 하나 있어요. 브라운 밴이 마당에 멈춰 서 있고, 담 너머로는 서프보드가 빼곡히 보입니다. 안으로 들어서면 문을 통과할 때마다 예측 불가의 장면이 나와요. 인센스 향이 포근하게 느껴지는 가운데 벽에는 파도를 타는 영상이, 공간에는 음악이 크게 흘러나오고, 가구는 제각각의 색을 품고 있죠. 이국적이고 엉뚱하고 자유로운, 마치 난파선을 개조해 만든 집 같달까요. 이름도 낯설고 귀여운, 키위브라운입니다.

이 공간을 만든 건 사쿠와 송희 부부입니다. 서울에서 금융인을 꿈꾸던 사쿠는 지금 바람을 읽으며 하루를 시작하고, 제주에서 처음 서핑을 해 본 송희는 그날 이후 매일 바다로 향합니다. 안정 대신 변화, 효율 대신 감각, 밥도 돈도 결국은 ‘좋은 파도’를 위한 삶을 산대요. 두 사람이 선택한 일상은 조금 낯설지만 거침없습니다. 지금 이곳의 파도처럼요.

여기가 바로 키위브라운이죠? 이 집, 직접 고쳐서 인테리어하신 거예요?

송희👩‍🦰 네, 여긴 서프용품을 파는 ‘타이니브라운샵’과 서핑 강습을 하는 ‘키위브라운’이 함께 있는 공간이에요. 원래는 오래된 주택이었고요. 하나하나 저희 손으로 직접 고쳤어요. 동네 중고 거래로 구한 용품도 있고, 바다에서 주워 온 나무로 만든 가구도 있어요. 꼭 필요한 것만 손보고 될 수 있으면 새로 사지 않는 식으로요. 그렇게 천천히, 저희 손으로 만든 가게입니다.

가게부터 거실, 주방, 마당까지 세심하게 손길이 닿아 있더라고요. 게다가 DJ 부스까지 있는 건 정말 반전이에요.

사쿠👨‍🦰 음악을 정말 좋아해요. 근데 부모님은 조용한 걸 좋아하셔서, 같이 살 땐 벽에 못 하나 박는 것도 어렵고 음악도 마음껏 못 틀었어요. 맨날 “시끄러운 놈” 소리 들으면서 지냈죠. (웃음) 그래서 언젠가부터는 음악이 자유롭게 흐르는 공간에서 일하고 싶다는 마음이 컸던 것 같아요. 지금은 공항 바로 옆이라 비행기 소리가 워낙 커서, 음악을 아무리 크게 틀어도 아무도 뭐라 안 해요. 저한테는 이게 진짜 천국이에요.

키위브라운이라는 이름은 어디서 온 건가요?

송희👩‍🦰 키위는 과일일 수도 있고, 뉴질랜드에 사는 새일 수도 있잖아요. 저희는 그 새처럼 조금 낯설고 느리지만 묘하게 매력적인 느낌을 좋아했어요. 브라운은 저희가 좋아하는 색이기도 한데, 캘리포니아 샌 오노프레 바다의 모래 빛, 오래된 브라운 밴처럼 자연스럽고 오래된 것들에서 영감을 받았죠. 동양인의 눈동자처럼, 우리의 정체성도 그 색 안에 담겨 있다고 생각해요.

내 가게를 만든다는 건 정말 신나는 일이잖아요. 처음엔 어떤 마음이었어요?

사쿠👨‍🦰 우리만의 색깔이 뚜렷한, 숨어있는 명물 같은 서프샵을 만들고 싶었어요. 어디선가 본 걸 따라 하기보다는, 우리가 직접 보고, 타보고, 느껴온 것들을 진짜로 녹여내자고 생각했죠. 취향이 분명한 공간을 만들고 싶었어요.

사실 이 공간만 봐도, 서핑에 진심인 게 느껴져요.

사쿠👨‍🦰 진짜 인생을 걸고 죽어도 좋다고 생각했어요. 한 번은 정말 서핑의 끝까지 가보고 싶어서 검색했는데, ‘서핑하지 말아야 할 곳 1위’가 페루라고 쓴 글을 봤어요. “오두막에서 서핑만 할 생각이면 가세요. 전 추천 안 합니다.” 그 한 문장이 너무 강렬했어요. 오히려 ‘이런 곳에서 서핑하면 진짜 뭔가 있겠구나’ 싶었죠. 그래서 회사 3년 다니며 모은 2천만 원으로, 그냥 그곳으로 떠났어요. 마지막 모험처럼요.

그렇게까지 큰 선택을 하게 된 이유는 뭐였을까요?

사쿠👨‍🦰 회사 다니면서도 서핑은 했지만, 어딘가 계속 성에 안 찼어요. 뭔가 더 넓은 세계, 더 큰 모험이 있을 것 같았고요. 질릴 정도로 해봐야 이게 내 길인지 아닌지 알 수 있을 것 같았거든요. 마치 피자나 치킨도 너무 많이 먹으면 물리잖아요. 그 지점까지 가보고 싶었어요.

단순히 그 행위가 좋아서라기보다는, 뭔가 더 본질적인 끌림이 있었던 것 같아요.

사쿠👨‍🦰 서핑에 진짜 매진해야겠다고 느낀 계기가 있어요. 이세돌 기사가 알파고(AI)한테 졌을 때였어요. 그때 ‘이제 인간이 하던 일도 AI가 다 하겠구나’ 싶은 위기감이 들었거든요. 앨빈 토플러 <제3의 물결> 책도 찾아보고,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지?’라는 고민을 엄청나게 했죠. 그러면서 ‘AI는 재미있는 건 못하잖아’란 생각이 들었어요. 서핑처럼요. 그게 인간다운 거고, 내가 해야 할 방향이라고 느꼈어요.

그렇게 모험처럼 떠난 페루에 실제로 가보니까 어땠어요?

송희👩‍🦰 인터넷에 있던 얘기들은 다 거짓말이었고요, 진짜 천국이었어요. 저희가 갔던 곳은 ‘완차코(Huanchaco)’라는 작은 마을인데, 인류 최초로 서핑이 시작됐다고 전해지는 곳이에요. 동네 사람들은 그곳을 ‘빠라이소’라고 불러요. ‘파라다이스’라는 뜻이죠. 파도를 타는 순간은 말할 것도 없고, 물 밖으로 나오면 어디선가 늘 음악이 흘러나와요. 진짜 꿈같았어요.

사쿠👨‍🦰 그때 알았어요. 인터넷 정보가 다는 아니구나! 물론 도움 되는 것도 있지만, 결국 자기만의 베스트플레이스는 직접 발로 찾아야 하는 것 같아요.

서핑을 선택하는 순간, 감수해야 했던 것도 있었을 것 같아요.

사쿠👨‍🦰 믿기 어려우시겠지만, 저 경제학과 출신이에요. 원래는 ‘세상을 움직이는 건 돈이다’라고 믿고 증권사에 가고 싶어 했죠. 잠실에 있는 금융회사에 다녔고, 부모님도 늘 자랑스러워하셨어요. ‘우리 아들 어디 다닌다’고요. 그런 기대까지 다 내려놔야 했어요. 그렇게는 도저히 살 수 없겠더라고요. 지금 이대로 가면 평생 공허하겠다는 위기감이 더 컸어요. 그래서 결심했죠. 픽사 영화 <업> 보셨어요? 거기 집이 풍선 달고 날아가잖아요. 저도 몰래몰래 제 풍선을 만들고 있었던 거예요. 회사 그만두고 부모님께 전화했는데, “미친놈아” 하시더라고요. (웃음) 그래도 말했어요. 풍선이 떴으니까, 이제는 가야 한다고요.

서핑도 스타일이 있다던데요. 두 분은 어떤 스타일인가요?

사쿠👨‍🦰 저희는 클래식 서핑을 좋아해요. 정확히는 캘리포니아 1970년대 스타일인데요, 저 같은 경우는 보사노바 음악처럼 부드럽고 여유 있게 타되, 위트가 있는 ‘핫도깅(Hotdogging)’ 스타일을 추구해요. 저는 ‘동물학파’라고 부르거든요. 서핑할 땐 저 자신을 사람이라고 생각 안 해요. 도마뱀이 된 느낌이랄까요. 관심 없는 척 있다가, 파도 보이면 확 달려가서 타는 거죠. 그 순간 사람들이 놀라면서 ‘미친놈이다’ 하는데, 전 그게 또 재밌어요. 그런 감각을 즐기는 편이에요.

송희👩‍🦰 예전에 한 강습생분이 그러시더라고요. 제가 보드를 타고 다가오는데, 마치 파도가 오는 줄 알았다고요. 그 말이 너무 좋았어요. 저는 정말 ‘파도 같은 서핑’을 하고 싶어요. 파도는 굽이굽이 흐르면서, 인간이 흉내 낼 수 없는 속도로 아주 자연스럽게 다가오잖아요. 저도 그 리듬을 느끼면서 파도와 하나가 되고 싶어요.

서핑을 얼마나 자주 하세요?

송희👩‍🦰 하루에 한 끼 먹을 때도 있어요. 노는 게, 그러니까 파도 타는 게 더 중요하거든요. 해가 조금만 더 길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자주 해요. 더 놀려고요. (웃음) 저희는 매년 연말부터 초봄까지는 해외에 나가서 적어도 두 달 이상 서핑해요. 그렇게 한 게 벌써 4년째고요. ‘이번 겨울엔 페루 갈까?’ ‘어디 새로운 데 갈까?’ 이런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해요. 서로 공통의 목표가 있어서 마치 종교처럼 움직이는 것 같아요. 그래서 싸울 일도 거의 없어요.

어디로 갈지는 어떻게 고르세요?

사쿠👨‍🦰 서핑도 스타일이 좀 갈리거든요. 모든 게 갖춰진 ‘캠프형’ 서핑 여행도 있고, 저희처럼 노지, 아무것도 없는 바닷가로 가는 스타일도 있고요. 저희는 후자예요. 둘 다 모험을 좋아하거든요. 정보는 최소한으로만 찾아요. 오히려 그런 게 더 설레요. ‘여긴 어떨까?’ 상상하는 게 너무 재밌어요.

송희👩‍🦰 업체 있는 데는 잘 안 가요. 한국인 후기도 없는 곳에 파도 하나만 믿고 가는 거죠. 그게 진짜 여행 같고, 진짜 서핑 같아서요.

바다는 두 분 삶에서 정말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잖아요. 매일 파도를 타며 사는 삶, 어떠세요?

송희👩‍🦰 한편으로는 바다에서의 시간이 인생의 전부는 아니라고 생각해요.

사쿠👨‍🦰 저도 바다에 하루 종일, 12시간 앉아 있어 본 적이 있거든요. 그런데 사람들이 다 떠난 후 혼자 남아 있으면, 마치 놀이터에서 혼자 노는 아이처럼 헛헛하더라고요. 저는 서핑을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데도 이상하게 그런 역설이 생겨요. 결국 파도는 우리가 죽어도 계속 칠 거잖아요. 오늘 못 타도 며칠 기다리면 또 오고요. 그래서 너무 목맬 필요 없어요. 아무리 재미있어도 스스로 끊고 집에 가는 게 진짜 멋있는 서퍼라고 생각해요.

‘인생은 비매품’이라는 표현, 처음 들었을 때 어떤 느낌이셨어요?

사쿠👨‍🦰 저는 그렇게 생각해요. 살 수 있는 건 돈으로 사고, 살 수 없는 건 시간으로 사야 한다고요. 예쁜 컵 같은 건 돈만 있으면 사지만, 진짜 인간적인 것들, 열정이나 따뜻함 같은 건 돈으로 못 사잖아요. 그런 건 결국 시간과 노력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송희👩‍🦰 저는 ‘인생’이 참 재미있다고 느꼈어요. 누구에게나 툭 주어지는데, 환불도, 교환도 안 되잖아요. 너무 좋을 때도 있고, 감당 안 될 때도 있고… 그래도 어쨌든 잘 살아내야 하니까요. 그래서 저는 이 우연한 인생을 조금 즉흥적으로, 재밌게 살고 싶어요. 비매품이니까 더 잘 써야 할 것 같아요.

그러네요. 사는 조건이 누구에게나 똑같지 않죠.

사쿠👨‍🦰 저는 인생을 카드 게임처럼 생각해요. 누구는 좋은 패를 받고, 누구는 덜 좋은 패를 받죠. 물론 좋은 패가 이길 확률은 높아요. 하지만 꼭 좋은 패만 이기는 건 아니잖아요. 중요한 건, 자기가 어떤 카드를 들고 있는지 아는 거예요. 그래야 비로소 그걸 어떻게 쓸지 선택할 수 있죠.

인생은 스스로 만들어가는 거라는 두 분의 가치관이 느껴져요. 그럼 어떤 가게, 어떤 삶을 만들고 싶으세요?

사쿠👨‍🦰 저는 멋있는 사람들이 아는, 숨어 있는 명물 서프샵이 되고 싶어요. 어디 가면 유명하다는 곳 말고, 딱히 티는 안 나는데 뭔가 묘하게 끌리는 그런 공간 있잖아요. 저는 그런 데를 좋아해요. 멋이라는 건 절대 자기 입으로 말해서는 안 되는 거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냥 흘러야 해요. (웃음) 그 멋이 자연스럽게 스며나와서, 사람들이 벌이나 나비처럼 어느새 찾아오게 되는… 그런 풍미 있는 가게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멋은 그 자체로 넘쳐흘러야 한다! 명언이에요.

송희👩‍🦰 저는 프로그하우스라는 서프샵을 닮고 싶어요. 캘리포니아 뉴포트비치에 있는, 50년이 넘은 서프샵인데요, 없는 게 없고 손님도 끊이질 않아요. 그런데도 사장님은 늘 서핑하러 나가 계세요. 저는 거기 5~6번 가서야 겨우 뵀거든요. 듣기로는 대기업이나 펀드에서 매각 제안도 있었는데, 다 거절하셨대요. 그렇게 되면 자기가 서핑을 못 하니까요. 저희도 비슷하게 생각해요. 일부러 마케팅을 안 하는 것도, 손님이 너무 많아지면 오히려 서퍼로서의 날카로움이 무뎌질까 봐요. 저희는 항상 물에 들어가 있고, 잘 벼려진 칼 같은 서퍼이자 사장님이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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